구호가 사실을 몰아내는 상황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정보통신윤리위원회에서 일하고 있으며, 이 메일링 리스트에서 많은 도움을
받고 있는 사람입니다. 적당히 말하는 것보다 침묵하는 것이 낫다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그러한 미덕이 진실보다 우선할 수 없는 것이라 생각하여 메일링에 글을
남깁니다.
저는 장여경 선생님의 호주 등급제 현황이라는 글을 읽고 적잖은 걱정을 하고
있습니다. 표현의 자유의 보호 혹은 신장이라는 이 메일링 리스트의 취지에는 백번
동의하지만, 사실을 적당한 구호로 왜곡하거나 잘못 전달하는 것은 바로 잡아야
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투쟁의 목표나 정당성이 사실에 기초하지 않고 구호에만
의존할 때, 그 투쟁은 힘을 잃을 수 밖에 없습니다.
장여경 선생님의 글은 신문기사에 의존해 주로 해외동향에 대해 얘기하고 있으나
많은 부분, 의도적이던 그렇지 않던 간에 사실을 왜곡하고 있습니다. 저는 사실에
대한 이러한 태도를 문제삼고자 합니다. 취지가 아무리 정당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사실은 사실 나름대로 받아들이는 태도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왜곡들은 대부분 약간의 관심만 기울인다면, 인터넷에 공개되어 있는 자료들을
통해 사실이 아님을 알 수 있기 때문에 제가 아니더라도 다른 분들이 언젠가는
지적하게 될 사항이라 생각합니다.
먼저, 일본의 사례를 말씀하시면서 일본은 명백한 불법정보를, 정부가 아닌
사법당국에서 규제하고 있다고 하셨는데, 이는 대체로 정확한 애기입니다. 다만,
일본 ENC의 등급서비스에 우정성, 문부성이 적극적으로 개입, 촉진하고 있으며,
유해정보의 경우, 텔레콤서비스협회, 사이버비지니스협회 등의 행동규약(code of
conduct) 형태로 정부에 의해 승인된 자율규제(sanctioned self-regulation)
모델로 합동규제(co-regulation)하고 있다는 점은 분명히 할 필요가 있습니다.
장여경 선생님이 분명하게 밝히시지는 않으셨지만 요점은 바로 규제의 반대가
아니라 규제방식의 문제에 있습니다. 이 점은 장여경 선생님도 동의하시리라
믿습니다.
유럽의 경우 짧게 언급하셨지만, 많은 부분 사실을 왜곡하고 있습니다.
유럽의 등급제 추진은 정확하게 말해 ICRA가 아니라 EC의 DG-13에서 담당하고
있습니다. ICRA는 유럽의 등급제 추진 기관이 아니라 국제적 등급서비스
기구입니다. 이 ICRA의 새로운 프로젝트들은 EC의 Action Plan(1999-2002)에 의해
추진되고 있으며, 이는 유럽의 등급제 프로젝트 기관이었던 INCORE의 연구결과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이를 위해 EC는 MED-PICS(의료정보에 대한 등급시스템),
새로운 ICRA 필터의 제작, 등급시스템의 개선, 제3자 등급분류방식의 서비스 개발
등 여러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유럽의회는 1997년 등급제 추진을
포함하는 인터넷 규제에 과한 의결안을 채택한 바가 있습니다. 유럽정부들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것은 사실과는 전혀 다른 내용입니다.
호주의 등급제에 관해서는 관련 기사를 번역해서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기 때문에
부연하지는 않겠습니다. 하지만 호주산업협회에서 호주의 등급시스템을 반대하고
있다는 것은 저로서는 납득이 가질 않는군요.... 지적하신 ABA의 인터넷 규제
조항들은 1999년 5월 21일 입법 추진되어 그해 12월에 통과된
호주수정방송서비스법(온라인서비스법)을 말합니다. 이 법안은 전형적인 합동규제
시스템의 입법화로, IIA(호주 인터넷 산업협회), SAIA, ACT Internet Association,
WAIA, TIA 등 여러 사업자협회의 행동강령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 법입니다. 따라서
이들 협회들이 해당 법률을 거부한다는 것은 좀 이해하기 힘듭니다. 왜냐하면, 이
법은 강제적 자율규제(enforced self-regulation) 모델로, 강령의 준수를 조건으로
정부의 직접적 규제를 유예하는 배용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규제효과가 부족하기
때문에 반대하는 것인지, 그러한 규제 자치를 반대하는 것인지는 내용을 좀 더
구체적으로 파악해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지금으로선 제 생각으로는 전자가
아닐까 합니다.
그리고 호주의 등급제는 불법정보에 한정되어 있다고 하셨는데, 이 역시 사실을
왜곡하고 있는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아마도 장여경 선생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신
것은 shot down 시스템만을 등급제로 보셨기 때문인 것 같은데, 호주의
등급시스템은 shot down 시스템 뿐 만 아니라 RAS(restricted access system)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 시스템은 정확히 청소년 유해정보의 유통을 제한하기 위한
시스템입니다. 이를테면 이번 망법의 청소년유해매체물 표시와 비슷한
시스템이죠.... 이러한 내용들은 호주방송청 홈페이지에 가보면 누구나 확인할 수
있는 내용들입니다.
저는 등급제가 자율규제 장치이며, 따라서 그것을 결정하고 집행하며 평가하는
모든 규제 과정이 민간 영역에서만 이루어져야 한다는 주장에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법의 한계를 너무나 단순하게 생각하는 결과입니다. 그리고
정보통신윤리위원회가 등급시스템 운영 주체이기 때문에 등급제에 동의할 수
없다고 하는 주장도 1)등급제의 원리를 잘못 이해하고 있으며 2)자율규제가 대안적
내용규제 방식이 될 수 있다는 점을 과소평가하고 있다는 점에서 동의할 수
없습니다.
먼저 PICS기반의 등급시스템은 어떤 등급기관도 독점할 수 없는 시스템입니다.
정보통신윤리위원회 역시 그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정보통신윤리위원회는
내용등급시스템을 대안적인 규제 제도로 보지 않고 내용선별 서비스의 활성화
측면에서만 보고 있습니다. 등급기준을 정보통신윤리위원회에서 정하기 때문에
검열이라고 보는 시각에도 동의할 수 없습니다. 현재 이용자가 이용할 수 있는
등급기준은 4가지 이상이며, 정보통신윤리위원회의 등급기준은 그 중 하나에
불과합니다. 정보통신윤리위원회는 이용자들에게 자신의 등급 시스템을 강요할
방법이 없습니다. PICS기반의 등급시스템은 본질적으로 등급분류와 내용선별
과정이 분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PICS를 이용하는 등급부여 방식은 복수의
기관에서 얼마든지 제공가능합니다. 다시말해 등급부여 과정을 독점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등급부여 과정은 다시 rat, prf 포맷의 파일을 통해 분산, 호환
가능합니다. 내용선별시스템 역시 독접할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이러한 상황은 정보통신윤리위원회의 내용등급시스템이 서비스를 시작하는 순간에
여러분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상황이 연출될 것이라는 점을 의미합니다.
PICS기반의 내용등급제에 관한 자료들은 얼마든지 공개되어 있습니다.
W3C홈페이지에도 있고, ICRA홈페이지에도 있고, 정보통신윤리위원회의
홈페이지에도 있고, DG-13이 운영하는 saferinternet.org 홈페이지에도 있습니다.
하지만 공동행동의 홈페이지에는 없습니다. 단언컨데, 공동행동의 홈페이지에는
최근의 PICS기반 등급시스템에 관한 어떠한 자료도 없습니다. 아마도 여러분들은
등급제가 무엇인지 알 필요가 없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자율규제가 대안적 내용규제 방식이 될 수 있습니다. 인터넷은 이미 초기의 소박한
파워유저의 커뮤니티가 아니며, 수많은 사람들이 이용하는 미디어입니다. 규제를
단순하게 반대하는 시각은 더 과도한 규제를 불러오는 "규제의 뒷면"일 뿐입니다.
저는 지난 6월26일 토론회가 많은 부분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인터넷에 대한 규제방식 전체에 있습니다. 그리고 이 문제가 전면에
등장한다는 것은 더 이상 반대의 구호로는 전진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대안적인 논의가 필요합니다. 어떠한 규제방식은 반대한다가 아니라
이러한 규제방식이 올바르다 혹은 표현의 자유를 보호하는 방식이다는 쪽으로
논의가 옮겨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논의의 이동에 있어 자율규제 관련
논의가 좋은 전환점을 만들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이미 청소년보호위원회가 자율규제를 축으로 하는 청소년 온라인 문화 종합대책을
내 놓았고, 정보통신윤리위원회 역시 인터넷내용등급서비스, 핫라인 네트워크 운영
등 자율규제 장치들을 실험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논의는 이보다 훨씬 더
근본적인 문제를 관통하고 있는 것이지만, 여러분이 반대하고 있는 정부 기구들의
규제 논의보다 훨씬 뒤쳐져 있습니다. 적어도 지금까지 제가 보기로는 사실보다는
구호에 천착하고, 대안보다는 반대의 목소리에 목표를 두어 왔다고 생각합니다.
얼마전 이 동하님의 글(토론을 촉구하는 글)을 읽으면서 활발한 토론에 대한
기대감이 많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저도 그러한 토론의 시간을 기다리고 있으며
그러한 토론의 한 부분을 지키고 싶습니다.
두서없는 글을 끝까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토론과정에서 실명을 언급한 것은 그 분이 실명으로 활동하시기 때문에, 굳이 제가
숨기더라도 이 메일링을 받아 보시는 분들은 다 알거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제
실명에 관해서도 저는 동일하게 생각합니다. 굳이 밝히고 싶지 않지만, 알고 계신
분들도 있으실 거고, 또 토론을 위해 밝혀야 한다면, 그것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좋은 하루 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