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폭 사이트란 이름의 해프닝 (주간 iWeekly, 제68호, 2001. 9)
느닷없이 조폭들이 활개 치고 있다. 밤거리의 뒷골목 유흥가가 아니라 각종
미디어들 속에서 말이다. 영화, 드라마, 뮤직 비디오 속에 비쳐진 세상은 온통
조폭 천지이다. 게다가 조폭들은 더 이상 흉악한 악당이 아니다. 그들은 한결같이
잘 생긴 얼굴에 세련된 옷차림을 자랑한다. 거기에 의리와 우정으로 똘똘
뭉쳐있기까지 하니, 가히 이 시대의 진정한 영웅의 풍모라 하겠다. 요즘은
청소년들 사이에서도 미디어가 만들어낸 조폭의 이미지를 동경하여 그들의 말투와
행동을 흉내내는 것이 유행이라고 한다. 더군다나 단순한 모방을 넘어서서 친구
집단을 '보스'와 '똘마니'로 위계화시키고 폭력을 부추기는 작용까지
불러일으킨다고 하니 마냥 가볍게 넘길 일은 아닐 듯 싶다. 경찰은 조폭들을
잡으려고 뛰어다니는데 미디어는 조폭들을 양산해서 팔아먹는 진풍경이 벌어지고
있는 셈이다.
영화 '친구'의 열풍이 조폭 신드롬의 근원지라고 많이 지적하지만 사실 조폭이
한국 영화에서 주인공으로 등장한 것이 어디 어제오늘 일이랴. 신성일의 '맨발의
청춘'까지 갈 필요도 없이 가깝게도, '게임의 법칙', '넘버 3', '초록물고기',
'약속' 등 조폭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는 승승장구 성공을 거두어 왔다. 여기에
'주유소 습격사건'의 건달들까지 저변을 확대해 보면 조폭은 흥행 영화의 영원한
보증수표나 다름없었다. TV 드라마에 맥락도 없이 튀어나오는 조폭들이나 노래
가사와 무관하게 뮤직 비디오에 얼굴을 내미는 조폭들은 미디어 산업이 생산해낸
잘 팔리는 이미지 상품에 다름 아니다.
단순히 영화 한편의 성공 때문이 아니더라도 조폭은 원래부터 뭇 대중들에게
동경의 대상이었다. 비록 현실세계에서는 근접할 엄두조차 나지 않는 두려운
존재이지만, 상상 속에서는 아무 거리낌없이 자신의 욕망을 마음껏 분출시키는
조폭의 당당함을 우리는 늘 꿈꾸지 않았던가. 그래서 힘센 아이들은 학교에서 조폭
흉내를 즐긴다. 집단을 만들고 규율을 정하고 때로는 진짜 폭력을 행사하면서
미디어가 가르쳐 준대로 그렇게 약육강식의 법칙을 배워 나간다. 그리고 조폭의
말투와 행동, 정서가 남성다움의 가장 전형적인 모습인 양 최면에 빠져든다. 반면
힘없는 아이들은 학교라는 현실공간 대신 인터넷에서 조폭의 세계를 간접
경험한다. 결코 맛볼 수 없는 조폭이라는 상상 속의 세계를 가상의 공간에서라도
구현해 보려는 것이다. 요즘 인터넷에 많이 만들어지고 있는 이른바 '조폭
사이트'란 것들도 결국은 채팅, 게임, 아바타 등을 통해 가상의 세계에서 또 다른
정체성을 체험하려는 네티즌의 보편적인 활동들의 연장선에 있다고 하겠다.
그런데 얼마 전 인터넷에서는 '조폭 사이트'를 둘러싼 작은 해프닝이 벌어졌다.
경찰이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 조폭을 표방한 동호회가 100 여개 이상 만들어져
운영되고 있다고 파악하고, 실제로 이들 중 진짜 폭력조직과 관련된 곳이 있는지
여부를 조사중이라고 발표한 것이다. 아울러 이들 '조폭 사이트'가 선동적인
문구로 청소년에게 폭력조직을 미화하고 학원 내 폭력조직 결성을 유도해
학원폭력을 확산시킬 우려가 있다는 친절한 설명도 잊지 않았다. 마치
자살사이트가 자살을 부추기고, 폭탄제조 사이트가 폭탄테러를 양산하며, 자퇴생
사이트가 학생들의 자퇴를 조장한다는 그 동안의 레퍼토리가 새로운 버전으로
재현된 느낌이었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이 보도가 방송에 나간 후 '조폭
사이트'의 운영자인 한 중학생이 그저 장난처럼 만들어놓은 동호회가 뉴스의
초점이 되고 경찰의 조사 대상이 된 것에 대한 당혹스러운 심경을 담을 글을
인터넷 게시판에 올려놓았다. 여기서 한번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자. 아무리 배짱
두둑한 조폭이라 해도 자신들의 폭력적이고 불법적인 행동을 인터넷에 버젓이
공개할 만큼 무모하겠는가 말이다.
경찰의 발표 이후 '조폭 사이트'들이 슬금슬금 사이트를 폐쇄하기 시작했다니 정작
폭력적인 것은 '조폭 사이트'가 아니라 이를 두고 호들갑을 떨었던 경찰이었던 것
같다. 물론 비록 가상일지라도 폭력을 미화하고 조폭을 영웅시하는 풍조를 옹호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하지만 폭력 앞에 노출된 청소년들이 걱정된다면 제일 먼저
손 봐줘야 할 것은 '조폭 사이트'가 아니라 조폭의 이미지를 상품으로 만들어
팔아먹는 미디어여야 할 것이다. 인터넷의 '조폭 사이트'는 미디어가 양산한
조폭이라는 불량식품을 소화한 청소년들의 배설물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